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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기록

 

이은주 (독립기획, 미술사)

2021.10

박형진은 최근 매일매일 창밖으로 바라본 나무를 색점으로 환원하여 그리는 연작을 진행하고 있다. 이 연작들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의 색들을 차곡차곡 모눈종이 위에 하나의 색점으로 안착시킨 결과물로서, 2019년 양주 창작스튜디오에서 본 산 풍경에서 2021년 금천예술공장의 창밖 풍경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달리하며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어느덧 박형진의 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 연작들에서 발견되는 것은 관찰을 통한 기록의 태도이다. 종이 위에 그려진 연속적 드로잉의 특성을 유지함으로써, 단일한 장면으로 완결되는 묵직한 회화로서의 위상보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일상적 풍경들의 꾸준한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보다 강화된 것이다.

박형진은 풍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생략하고 색채에 온전히 집중했다. 색에 대한 박형진의 이러한 접근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업은 <강물은 다시 흘러야합니다>(2017)일 것이다. 이 작업은 사대강 사업으로 인한 금강의 녹조현상에 대한 보도기사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녹조의 두께가 8cm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직접 금강의 여러 구역을 찾아다나면서 녹조의 색채, 질감, 생태를 기록하여 총 326장의 드로잉을 완성했다. 이 드로잉들은 8cm의 두께로 쌓아져 녹조의 두께를 지시했고, 그 자체로 환경 파괴의 현장에 대한 기록의 역할을 했다. 작업의 특성상 시간의 진행에 따라 점차 농밀해지는 녹조의 상태는 그대로 작업에 전사되듯 반영되었는데, 여기에서 녹색은 자연의 생태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색채가 자연 현상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작가의 인식은 이후 계절의 변화에 따른 풍광을 기록하는 색점 연작의 계기로 작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년간의 계절의 변화를 담은 <일년의 숲>(2019-2020)이나 봄의 진행 과정을 기록한 <개나리 동산>(2021)에 이르기까지, 박형진의 색점 연작은 자연의 색을 평면 위에 기록할 수 있는 하나의 정보로서 환원하는 과정을 통해 나오는 작업이다. 흥미롭게도 박형진은 이 연작을 위해서 스스로 조색한 색채를 체계화한 색채표를 만들었다. (이러한 색채표는 <초록해설>(2019-2020)>과 같은 별도의 드로잉 작품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작가의 주관적 시각으로 채택된 색채 값은 흡사 객관적인 지표를 가진 표본처럼 작업을 위해 활용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박형진의 작업에서의 색점은 생동하는 색을 순간순간 추적했던 인상주의자들의 그것과 달리,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체적 풍경을 관망하는 기록자의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지할 점은 박형진의 색채표에 기록된 색가(色價)들이 사회적 규약으로서 통용되는 표준적 정보가 아니라, 작가 개인의 정서적 질감이 반영된 주관적 경험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예컨대 “맑은 새싹 색”, “따뜻한 나뭇잎 색”, “해가 지면서 내는 숲의 색”, “여름 같아서 수박 먹고 싶은 쿨한 초록잎 색” 등, 일견 체계적으로 보이는 그의 색채표에 기록된 짤막한 설명에는 정보화되기 어려운 세심한 정감과 일상적 시간의 경험이 묻어난다.

실상 박형진의 작품 속에서 일견 픽셀처럼 보이기도 하는 여러 톤의 색점들은 정확한 규격의 모눈종이 위에서도 마치 미묘한 빛을 발산하는 듯한 자연풍경의 인상을 만들어낸다. 연한 새싹의 간드러지는 발아의 느낌이나 비 내린 오후 청량하고 시원시원한 녹음의 인상이 전해지는 것이다. 박형진의 색점 연작이 마치 디지털 정보처럼 코드화된 체계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다감한 풍경의 인상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만든 색채표를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기록된 색 정보 안에 우리가 계절이 만연한 자연 속에서 느끼게 마련인 빛, 온도, 대기, 습도, 그날그날의 감정 상태와 연동되어있는 보다 내밀하고 공감각적인 색채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박형진의 색점 연작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모눈종이의 활용이다. 금강에 대한 녹조 드로잉에서도 활용된 바 있는 모눈종이는 최근까지 그의 색점 연작에 중요한 형식적 틀로 작용하고 있다. 모눈종이는 가로축과 세로축을 통해서 형태를 자리매김하는 기능을 하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대번에 설계도와 같은 공간적 위치 설정의 기획을 떠올리게 한다. 박형진은 이러한 모눈종이의 그리드를 색점들이 찍히는 면으로 활용함으로써, 그가 풍경에서 감지한 자연적 시간에 공간적 자리를 부여했다. 시간을 공간화하고, 특정한 시간대를 하나의 ‘영역’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박형진의 과거 작업들을 되짚어보면, 자연의 땅이 제도 속에서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 영역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의 땅이 소유권, 개발논리 등 인공적 제도에 의해서 종속되는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소유권 문제에 얽힌 송현동 부지를 다룬 <주인있는 땅_송현동 48-1>(2015)에서 평창동계올림픽에 의한 개발을 다룬 <넓은 산_가리왕산과 올림픽>(2018), 성북동의 담장 안 자연풍경을 다룬 <주인있는 땅_성북동>(2019)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금강의 녹조에 관한 작업 역시도 인공적 보로 인한 자연의 변화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땅 시리즈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박형진은 그간 자연 그대로의 생태와 그것 위에 작동하는 인공적 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켜왔는데, 모눈종이는 금강의 녹조를 기록한 <강물은 다시 흘러야합니다>(2017), 성북동 연작 중 하나인 <푸르게 앉아있는 것_성북동>(2018)과 같은 작업에서 효과적인 매개체로 작동했다. 모눈종이가 땅을 측량 가능한 범위로 영역화하는 기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박형진의 작가적 입장을 적절하게 형식화해준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땅 시리즈 이후의 색점 연작들에서 모눈종이 위에 규칙적인 색점을 찍는 제작 방식을 채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박형진은 모눈종이보다 더 풍성한 색감을 가능하게 하는 한지를 사용하기 위해서, 모눈종이 대신 건축용 먹선을 튀기는 방식으로 그리드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의 작업에서 모눈종이의 재료  자체보다 형태를 좌표화하고 위치를 만들어내는 그리드가 더 핵심적인 형식과 의미의 틀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드는 자연계를 인공적으로 인식가능한 범주로서 구획하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박형진의 색점 연작에서 이러한 그리드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색을 특정하게 인식 가능한 시각적 영역으로 전이하는 그의 작업 태도 자체를 표상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박형진의 색점 연작들은 자연의 상태를 그리드를 통해 필터링하여 평면 속에 놓인 시각적 정보로 전이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빛과 대기의 변화를 포함한 공감각적 경험을 하나의 평면 영역으로 고정하고, 절기라는 시간적 경험을 공간적 단위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관람자는 박형진에 의해 섬세하게 직조된 색점들을 통해서, 색채 영역으로 치환된 특정 시간대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 색점들은 변화되는 자연의 풍경을 통해 면면한 생명 시간의 흐름을 주지시키면서 삶의 주기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Hyungjin Park has recently been working on a series of paintings of color points derived from trees she observed every day from her window. These works are the result of sequentially recording the changing colors of the landscape as singular points on graph paper.

From the mountain scenery she saw at the Yangju City Residence Studio in 2019 to the scenery outside the window of the Seoul Art Space Geumcheon in 2021, Hyungjin Park has continuously worked on this project from different places. In this series, which has already taken an important place in Hyungjin Park's oeuvre, the artist’s attitude towards documentation through observation stands out. Rather than creating a painting depicting a single scene, the continuous nature of Hyungjin Park’s drawings on paper strengthens its documentary characteristics from which it derives its meaning.

Concentrating entirely on color, Hyungjin Park omits numerous elements that make up the landscape scene. The River Should Flow Again (2017), which started as a response to a news article about the algae phenomenon in the Geum River resulting from the Four Major Rivers Project, was an important turning point in the artist’s approach to color. After reading that the thickness of the algae was 8cm, she visited various areas of the Geum River and recorded the color, texture, and ecology of the algae, completing a total of 326 drawings. These drawings were stacked to a thickness of 8 cm, referencing the thickness of the algae, and this served as a record of the site of environmental destruction. Green algae gradually grows denser over time, and this quality is reflected in the form of the work. In this work, green has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ecology of nature. The artist's recognition that color can be a barometer of natural phenomena led to further inquiries into the documentary function of color points that record scenery according to the change of seasons.

From July to June (2019-2020), which depicts the change of seasons over a year, to Korean Garden (2021), which records the progress of spring, the color point series is manifested as information recorded on two-dimensional surfaces with natural colors. Interestingly, in this particular series, Hyungjin Park created color tables that systematized the colors she had mixed herself. The color tables were also exhibited as separate drawings such as Green Commentary (2019-2020).

The color values ​​adopted from the artist's subjective point of view used for the work resemble color samples with similar objective indicators. In this respect, the color points in Hyungjin Park's work are derived from her attitude as a recorder who observes the overall landscape across the flow of time, which contrasts with the Impressionists who pursued vibrant colors moment by moment.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 color values ​​recorded in Hyungjin Park's table are not standardized information used as social rules, but are closer to subjective experience values ​​that reflect the texture of the artist's individual emotion. For example, “clear sprout color,” “warm leaf color,” “the color of the forest as the sun goes down,” “the cool green leaf color that makes you want to eat watermelon as if it’s summer” are recorded in the color table. The artist’s brief explanations, which at first seem informational and systematic, are filled with meticulously recorded feelings and experiences of everyday life.

In fact, the multi-toned color points that initially resemble pixels in Hyungjin Park's work create the impression of a natural landscape that seems to emit subtle light, even on graph paper of precise dimensions. It conveys the feeling of germination and soft sprouts or the impression of refreshing and cool greenery on a rainy afternoon. The digital-like system of coded information that Hyungjin Park utilizes in her series of color points raises questions about the impetus for creating such an impression of a landscape. As revealed through the artist’s color table, the recorded color information is linked to the light, temperature, air, humidity, and emotional state associated with each day that we are bound to feel in nature in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season. This method of recording information also contains an intimate and synesthetic color experience.

 

The most prominent feature of Hyungjin Park's series of color points is her use of graph paper. Until recently, graph paper, which was also used in her green algae drawings on the Geum River, has acted as an important framework for her color point series. Since the graph paper functions to position the form through horizontal and vertical axes, it retains associations of urban planning and spatial positioning. By using the grid of graph paper as the surface on which the colored points are applied, the artist gives a spatial place to the natural time she sensed in the landscape. Time is spatialized and a specific time zone is replaced with a single 'region'.

 

Hyungjin Park's previous works demonstrate her interest in defining natural land as an area with specific social meaning in the institution. She is particularly interested in the subjection of pristine land to artificial institutions such as ownership and development logic, which is explored in the following works: Land with Owners_48-1 Songhyeon-dong (2015), which deals with land in Songhyeon-dong related to issues of ownership; Broad Mountain_Mt. Gariwang and the Olympics (2018), which deals with the development by the Pyeongchang Winter Olympics; and The Land of Owners_Seongbuk-dong (2019), which deals with the natural scenery inside the walls of Seongbuk-dong. The aforementioned work on algae in the Geum River can also be understood within the same context as the Land series in that it deals with changes in nature caused by artificial weirs.

In this way, Hyungjin Park has developed an artistic perspective exploring natural ecology and the artificial framework that operates within it. Graph paper worked as an effective medium in her works, such as The River Must Flow Again (2017), which documented the algae of the Geum River, and Sitting in Blue_Seongbuk-dong (2018), one of the Seongbuk-dong series. Graph paper properly formalized Hyungjin Park's position as an artist by territorializing the land within a measurable range. In this context, it was natural for the artist to adopt a production method of making regular color points on graph paper in the series of color points that follow the Land series. Recently, Hyungjin Park has started to set up the grid in a way that uses hanji (Korean paper), which enables richer colors than graph paper by flipping architectural ink lines instead of graph paper. What becomes clear with this adaptation is that the grid, which coordinates shapes and creates positions, acts as a more essential frame of form and meaning than the material of graph paper itself in Hyungjin Park’s work. The grid creates a system that divides the natural world into artificially recognizable categories. In Hyungin Park's series of color points, this grid serves to represent the attitude of her work, which translates the shifting colors of nature into a specifically recognizable visual realm.

In the end, Hyungjin Park's series of color points filter the state of nature through a grid and transfer it to visual information displayed on a two-dimensional surface. The synesthetic experience, including changes in light and atmosphere, is fixed as a flat surface, and the temporal experience of divisions of the year is visualized in spatial units. The audience encounters the landscape of a specific time period represented by the color area through the color points delicately created by the artist. The color points allude to the cycle of life, noting the flow of time that we face through the changing landscape of nature.​ <금천예술공장 평론가 지원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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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들, 누크갤러리> 그림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유근택 _전시서문 발췌(2021.02)

·박형진은 전통 모필의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대상을 예리하게 개념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그녀만의 방식은 화면에 모필의 표현에 있어서 자신의 성격과 태도를 오히려 드러냄으로서 흔히 빠지기 쉬운 필법의 카테고리와 함정을 피해 가고 있다. 그의 화면에 가끔 개념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눈종이의 형태는 장흥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안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나가는 창문의 색채를 점묘적인 터치로 기록한 그의 연작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1

전시리뷰_

박형진 개인전 「까마귀와 까치」전시에 부쳐

글_최희진 (교보아트스페이스 디렉터)

2022.03

 

 

겨울의 끝, 박형진 작가의 「까마귀와 까치」 전시를 보기 위해 오래된 건물의 계단을 올라갔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작품은 <개나리 봄>. 개나리가 연상되는 노란색 점이 모눈종이 칸칸마다 찍혀 있는, 따뜻한 인상의 그림이다. 그림 가까이에 서서 개별 단위로 다채로운 색점들을 관찰하다가, 뒷걸음질로 좀 거리를 두고 그림을 다시 본다. 노란 빛 가득한 <개나리 봄>을 보며 ‘봄이 오긴 올텐데, 어떤 봄이 올 것인가’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 공간을 쓱 훑으니, 초록이 풍성하게 칠해진 커다란 한지 작품들부터 눈에 들어왔다. 한지 작품인  <오동나무 칠월>, <오동나무 구월>, <오동나무 시월>, <오동나무 팔월>, <오동나무 July to December>와 같은 ‘오동나무’ 연작은 명도와 채도가 다른 ‘초록색’이 그리드로 만들어진 칸마다 각각 칠해져 있다. 작품 제목만으로도 작가가 무엇(오동나무)을, 언제(구월, 시월, 팔월 등) 그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작업들이다. 이 작업을 할 때 기계적으로 그리드를 그리고자 건축용 먹 선을 튀기는 방식을 한지에 적용했다는 작가의 설명대로, 한지 작품의 그리드는 모눈종이에 인쇄된 그리드처럼 감정이 배제된 하나의 ‘표준 단위’로 보여진다. 한지 작품도 모눈종이 작품처럼 ‘큰 면’이 쪼개져 ‘작은 면’들의 단위로 작동하고 있었다. 다시, 전시에 앞서 작가가 밝힌 소회를 읽으며 전시를 관통하는 한 문장, ‘…..함께 존재하는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에서 멈췄다. 이 문장과 그리드 색면은 ‘까마귀와 까치’ 전시에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작가에게, 함께 그리고 현재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박형진 작가는 이번 전시 제목 「까마귀와 까치」 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산에 묻고 내려오던 길에 목격한 장면에서 시작된 것이라 말했다. 죽음을 애도하고 돌아가던 길, 오래전부터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온 두 새(까마귀, 까치)가 한 나무에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봤다. 죽음이 삶과 밀접하게 느껴지던 특별한 슬픔을 느낀 후에 우연히 본 이 장면은, 당시의 상황에서 느끼던 슬픔만이 아니라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변화 속에서 느끼던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을 돌아보게 했으리라. 코로나 전염병이 일상이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살아 남는 것, 살아 가는 것, 죽는다는 것’을 종이 한 장 차이로 가까이 느끼게 된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미 생(生)과 사(死)의 ‘함께’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된 일상을 살며, 매일의 풍경이 색으로 환원되는 작품들을 하고 있었고 그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의 제목을 ‘까마귀와 까치’로 연결시켰다.

작가도 밝힌 바 있지만, 색이 하나씩 칠해지는(찍히는) 모눈종이 칸들과 없는 듯 가리지 않고 가로 세로줄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지 작품의 그리드 칸들 모두 작가에게 있어 일종의 시간 단위였다. 비유하자면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하는 날들, ‘벌써 한 달의 절반이나 지났어?’를 내뱉을 때 느끼는 자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덩어리를 쪼개어 기록하는 장치인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만들어진 그리드를 한 칸씩 채웠는데, 첫 번째 칸을 채울 때 마지막 칸의 색을 작위적으로 결정하지 않았으며 어제 채운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되돌아 가지 않았다. 이미 색으로 채워진 칸들이 아닌 채워야 할 빈 칸들에 집중해 매일의 풍경을 칸마다 담았다. 현재성. 이처럼 시간을 덩어리가 아닌 작은 ‘조각의 모음’으로 받아들이며 미세한 매일의 변화들에 반응하는 태도로 색점을 찍거나 칸을 칠한 작업은, 작가가 말하는 ‘현재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특히 초록이 특징적인 풍경 시리즈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현재성’에 집중한 대표적 작품들로, 작가에게 이 시리즈의 계기는 매우 사소하고 자연스러웠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어둠에 갇힌 것 같던 시기, 작가는 레지던시 작업실 사용이 금지되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차단된 일상을 살고 있었고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 밖 풍경에 푸릇푸릇한 잎들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작가는 고민을 내려두고 초록의 풍경을 그려 나갔다. 계절이 변하며 갑자기 맞닥뜨린 생명력 넘치는 나무와 풍경이 작가의 눈에 들어와 삶과 작품을 밀착시킨 것이다. 작가는 코로나로 인한 ‘죽음‘을 알려주는 뉴스를 매일 접하며 일상이 멈춰져 있었지만, 자연은 변함없이 새 잎이 움트는 계절로 향하고 있었던 것을 새삼 인식했다. 이 인식은 살아 있음의 감각을 되살리며 ‘생명력’에 대한 결핍을 채워주었고 작가는 그러한 ‘생명력’의 인상을 바라보며 풍경을 색으로 환원한 것이다. 모눈종이를 바탕으로 한 작업을 한지 작업으로 확장하여 초록의 풍경을 더 깊고 풍부하게 담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들이 멈춰져 있던 시절에, 작가는 ‘자연’을 마주하며 세상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사실, 박형진 작가는 오래전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그 문제를 이해하고자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특히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땅’과 ‘자연’이 다뤄지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고, 이를 비판적으로 되짚는 작품들도 선보였다. 우선 ‘땅’의 문제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대부분 메마른 ‘땅’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들이었는데, 작품의 제목을 통해 ‘어떤 땅’인지 드러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15년 ‘땅’을 그린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그 중 <주인 있는 땅_송현동>은 작가가 작업실 주변 ‘송현동’ 땅이 약 10년간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것을 오가며 봤고, 그 오랜 관찰의 기록을 그린 것이었다. 이 작품 속 대상이 된 서울 한 복판의 공터는, 잡풀만 무성한 ‘폐허의 땅’처럼 보였지만 대기업간 송사가 얽힌 장소였고 자본의 논리로만 채울 수 있는 비싼 땅이었던 것이다. <주인 있는 땅_송현동> 작품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공터를 사실적으로 그린 덤덤한 외양이지만, 땅 값 비싼 서울에서 10년 이상 공터로 있을 특권과 그 뒤에 숨겨진 자본주의 논리의 모순에 질문을 던진다 평가받았다.

또한 작가는 사대강 사업으로 ‘자연’의 훼손이 가해진 금강의 녹조 현상에도 큰 관심을 두었었다. 신문에서 사대강 사업 이후 금강의 녹조가 8cm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직접 금강을 찾아갔고 강의 색이나 생태를 관찰하며 기록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2017년 ‘강물은 다시 흘러야 합니다’ 연작들을 그렸다. 심지어 녹조의 색이 흡수된 듯한 중326장의 드로잉을 쌓아서 녹조의 두께를 재현한 입체 작품도 만들었다. 작품의 외양은 색 그 자체로 완성된 추상작품으로 보여졌지만 실제는 사대강 사업의 실패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때를 계기로 작가는 현실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색을 중심에 둔 비구상 작업을 확장시켰다. 그렇기때문에 그리드를 기반으로 하는 박형진 작가의 작품들은 서사가 없는 유토피아 공간으로 해석되는 추상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실과 엮이며 반응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추상의 형식으로 사회 문제를 껴 안는 박형진 작가의 작품은 ‘예술의 자율성’ 관점에서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독일의 미학자 아도르노(Theodor Ludwig Wiesengrund Adorno, 1903 - 1969)는 예술작품을 ‘정신’이 있는 하나의 대상이라고 전제하며 ‘예술의 자율성’에 대해 말했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정신은 ‘사물 자체의 정신’으로서 일반적 예술이론에서 말하는 예술가의 정신과도, 예술작품 밖의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사상 내용과도 다르다.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의 정신이 작품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주어져 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형상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설명한다. 말하자면 예술 작품의 정신은 절대적 위치에서 작품의 내용과 형태를 결정하는 추상적 전제조건이 아니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침투한 현실 요소가 예술작품 본연의 형식화 과정을 거치며 자족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 때의 현실 요소를 사회를 통합하고 지배하는 규격화된 원칙이나 법칙의 ‘합리성’이 배제시키는 ‘비합리적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 ‘비합리적 요소’들은 ‘이질적인 것, 통합할 수 없는 것, 침묵하고 있는 것, 축출된 것, 비논리적인 것, 감각적인 것, 우연적인 것’ 등으로, 언어로 그 상태나 상황을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의미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것들 가운데 역사에 축적된 ‘고통’ 역시 ‘합리성’이 배제시키는 비합리적 현실요소로 보며, 자신의 저서 『미학이론』에서 “고통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린다면 역사 기술로서의 예술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라 적기도 했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동일화되고 개체의 자유가 박탈된 고통의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만큼은 사회에 축적된 고통을 인식의 차원으로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한 예술작품은 ‘비합리적 요소’들이 형식화 과정을 거쳐 정신을 갖는 존재가 되고, 현실 사회와 연관한 대상으로 존재하면서도 직접적 지시를 거부하며 자율적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아도르노는 ‘화해되지 않은 현실’을 직접 모사하는 것도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이라 말하며, 예술작품의 언어는 순전한 ‘제시됨’으로서만 전달되는 의도 없는 언어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박형진 작가는 현대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작업 의도 혹은 주제로 삼으며 작품을 만들어 온 과정에서, 내용 추측을 돕는 특정 ‘대상물’과 ‘서사’를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특히 이번 「까마귀와 까치」 전시에서 격자마다 비슷한 듯 다른 초록의 색들이 덮인 ‘오동나무’ 시리즈 작품들의 경우, 그 외양적 특징에 의해 작가의 기계적인 작업 방식이 가장 먼저 인지된다. 하지만 전시를 보며, 다소 감각적 느낌으로 ‘수용’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떠올랐는데, 그 감각이 유발되는 것이 궁금하면서도 나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 감각에 머무르며 결이 다른 듯 보이는 ‘구체적’ 대상이 읽히는 작품들을 감상했다. ‘오동나무’ 시리즈 작품이 전시된 공간의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려 있던 <겨울 숲>, 바람 부는 숲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도록 그린 <눈 오던 숲>, 그리고 작가가 모눈종이 연필 드로잉을 지우는 영상과 먹으로 점을 찍은 수십장 펼쳐지는 드로잉 작업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작품이 전달하는 ‘수용’의 감각에 대해, 아도르노의 관점으로 예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매우 극단의 추상 작업으로 분류할 만한 ‘오동나무’ 시리즈 작품들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형상이 드러나 작가의 내면으로 읽히는 다른 작품들과 공명하며 그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작품이 사회 문제에 대해 직접 화법으로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화의 과정을 거쳐 추상적 형태로서 그 문제를 인식시키는 것이 가능한가?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스쳤다.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제시됨’으로서만 전달되는 의도 없는 언어이어야 한다는 말이 인간의 감각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것인가, 도 되묻게 되었다. 「까마귀와 까치」 의 작품들이 작가가 작품으로 들어간 과정적 의도를 보여주지 않아서 티 나게 정치적이지 않고, 거칠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전시된 작품들을 보자마자 ‘봄이 오긴 올 텐데, 어떤 봄이 올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역시 예술작품이 감상자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충격을 가하는 방식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결국 올바르게 완성된 예술작품은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회 뉴스들을 찾아보며 희망 가득한 봄을 기다리던 2월, 결국 추상적 외양의 작품들은 나를 반응하게 한 셈이다. 하지만 원하는 봄이 오지 않은, 그때부터 시간이 흘러온 현재 「까마귀와 까치」 전시를 봤다면 어땠을까.

박형진의 푸른 잎

 

 

김소라(독립기획자)

2021.08

 

푸르름이 나누어진다. 맑은 새싹색으로, 나뭇잎의 그림자색으로, 비오는 날의 숲색으로, 또 다른 빛과 색으로... 종이의 한바닥 가득 그어진 격자 속으로 싱그러운 녹색이 스며든다. 박형진의 푸른 잎이다. 작가는 마침 창밖의 나뭇잎이 보여서 이를 옮겼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저 그때 그것이 눈에 들어와서 그렸다고. 그렇게 자연의 색이 나누어진 칸마다 제자리를 찾아 내려앉았다. 어느 것 하나 넘치거나 모자랄 것도 없이 고르게, 공기처럼 가볍게, 순간의 색으로 그러나 해마다 거듭했을 푸른 생명력으로.

 자연의 관찰이자 색의 탐구이자 화가의 일기인 그의 작업은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식물의 단면을 집요하다 싶은 성실함으로 포착한다. 꼼꼼한 기록이 얼핏 허윤희의 ⟨나뭇잎 일기⟩를 떠올리게도 하고, 반듯한 사각 모듈의 반복이 바이런 킴의 ⟨제유법⟩과도 형식적 유사성을 찾게 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작업이 소로의 『월든』같은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요, 단순한 컬러 차트를 만들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박형진의 작업은 계절의 바뀜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의 펼침이다. 나뭇잎은 제 색을 바꾸어 시간을 가두고, 작가는 탁본 뜨듯 얇은 종이 위에 그 순간을 물감으로 찍어 남긴다. 이러한 그의 작업에서 우선 드러나는 것은 색의 차이와 농담에서 오는 시각적 즐거움이다. 두 칸도 아니고 꼭 한 칸씩만, 균등하게 나누어진 푸르름이 가벼운 리듬으로 통통 튀어 오른다.

 지난 몇 년간 박형진의 작업을 돌이켜 보면, 그의 작품은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게 발언하던 것에서 점차 말없이 자연을 응시하는 것으로 옮겨왔다. 인간사의 문제는 대개 소유와 분배에서 비롯한다. 말 그대로 소유(所有)는 무엇보다 공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박형진의 전작 ⟨주인 있는 땅⟩(2015~2019), ⟨좁은 방 넓은 들⟩(2019)에는 공간을 가진, 점유된 땅에서 울타리로 구분되는 이쪽과 저쪽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사대강 사업의 녹조 폐해를 담은 ⟨강물은 다시 흘러야 합니다⟩(2016~2018)과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개발되어 움푹 파인 가리왕산을 그린 ⟨넓은 산⟩(2018) 연작은 흐르는 강물과 천오백 고지의 우뚝 솟은 산마저 인간의 소유인 양 마구잡이로 다루는 경제 논리를 개탄한다. 인위적인 나눔이며, 불균등한 분할이 힘의 논리로 휘둘러지는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작가의 의무감으로 기록한 작업들이다. 그런데, 당시 잔뜩 화가 나서 그렸다는 그의 ‘비판적' 작업이, 적어도 내게는, 희한하게도 그다지 날이 서거나 성나 보이지가 않았다. 그의 정치적 메시지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는 화가의 시선이 저만큼 지상과 거리를 두고 있어서였다. 동양화를 공부한 작가에게 풍경을 그릴 때 부감법을 쓰는 것이 익숙하기도 할 테지만, 붕 떠 있는 그 시선이 종이 위에 그려놓은 소재 밖의 더 큰 것, 즉 복작거리는 인간사가 보잘것없어질 만큼 커다란 자연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어서 그의 작품은 되레 짐짓 덤덤해 보였다. 아웅다웅 인간이 담장을 세우거나 말거나 풀은 무성히 솟아나서 작가는 저걸 어떻게 다 세필로 그렸을까 싶고, 썩은 내가 날 것 같은 녹조는 그 와중에도 참 고운 초록이다. 지상의 묵직함으로는 가둘 수 없는 간질간질한 기운이랄까, 얇고 가벼우며, 제각각이지만 거대한 질서 속에 움직이는 자연이 그의 작업 속에는 늘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박형진이 시선을 옮겨 나뭇잎을 바라볼 때, 반투명한 잎사귀와 투과하는 햇빛을 포착할 때, 그가 그리는 것은 더는 넓거나 좁은 면적에 대한 고민으로 국한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은 정체된 것이 아니요, 어느 단단한 물질 위에 꽁꽁 묶어둘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선마다 격자 하나씩, 동등한 넓이를 나누어줌으로써 대신 작품의 문제는 이제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가, ‘공(空)’을 그리는 관점으로 옮겨오게 된다. 한껏 물을 머금은 물감은 세상사의 내러티브를 투명하게 희석하고, 얇은 한지 위에 먹줄을 튀겨 만든 선은 칸과 칸 사이 세포막처럼 얕은 숨구멍을 내어 부드럽게 서로를 이어준다. 푸르름 옆의 푸르름으로, 고유성은 위계질서 없는 복수성을 통하여 저절로 드러난다. 다시 네모 칸 옆의 네모 칸 옆의 네모 칸은… 순간인 동시에 순간의 무한대인 영원으로, 펼침과 반복이 빚어내는 조화로, 자연의 순환으로 향한다.

 그가 채워나가는 이 푸른 모자이크에 최종판이나 완성본이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연이 멈추지 않는 한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수천 수백 번 반복하여도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자칫 근엄하고 웅장한 개념으로 치장할 수도 있는 주제인데도, 박형진은 어디까지나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현상 자체와 이를 받아들이는 직관적 감각에 머무르며 하나의 예술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집중한다. 마치 그것이 순간을 살아가는 생명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라는 듯이. 무엇이 될지 모를, 무엇이 되어도 될 열린 구조이기에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삶의 피로를 잠시 내려놓게 된다. 지금 이 상태로도 좋지 아니한가. 자, 그러니 어서 빨리 새 작업을 내어놓으라 보채지 말고 현재 작가의 호흡을 함께 바라보자. 이렇게 오늘도 한 칸의 푸르름이 또 채워진다. ◼

​<금천예술공장 평론가 지원 프로그램>

박형진 개인전 <푸르게 앉는 공(空)> 리뷰

앞에 놓인 것,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그리고 너머의 것

윤여준 (기획자,2020.01)

 

어두운 숲을 서성인 적이 있다. 내리쬐는 햇살에 선명하게 빛나던 나무는 어느새 새카만 그림자를 형성했고, 눈앞엔 어스름만이 놓였다. 후레쉬를 찾는 내게 동행인이 말했다. 빛을 켜면 당장의 앞은 보일 테지만 빛이 닿지 않는 곳은 보지 못한다고. 우리는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기로 했다. 눈은 서서히 암흑에 적응했고, 우린 모호하게 보이는 숲을 천천히 돌아 나왔다. 눈앞의 것과 저 멀리의 것을 모두 바라보며.

 

박형진은 본다. 앞에 놓인 것과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그리고 너머의 것을 본다. 그리고 본 것을 그린다. 그의 눈은 자주 같은 장면에 머물고, 익숙함이 낯설어지거나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멈춘다. <칠월부터 십이월>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창문 밖 초록의 기록이다. 해의 방향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초록을 그려내기엔 손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점으로 색을 찍는다. 계절이 바뀌며 초록은 결국 초록이 아니게 되지만, 박형진은 그 변화한 색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해설한다. 그림이라기보단 관찰기이고, 관찰기라기보단 안부 인사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본다는 것”을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은 망막에 맺힌 대상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아닌, 나를 둘러싼 세계에 자신을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박형진의 보기 역시 그러하다. 매일매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초록에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일, 그 일은 창밖의 초록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초록의 변화를 알아채는 일이며, 창밖의 초록에 작가 자신을 가져다 놓는 일이다. <칠월부터 십이월>은 박형진과 창밖의 풍경이 서로의 변화를 주고받는 안부 인사일지도 모른다.

 

박형진은 주변을 본다. 그리고 익숙한 곳을 더 익숙하게 만드는 낯선 요인들을 발견한다. 항상 그곳에 있던 가까운 풍경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 작가는 그 모습을 지나치지 않는다. 퐁티는 보는 이가 그렇듯, 그가 보고 있는 세계 역시 그를 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보는 이는 보는 행위의 주체임과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이 된다. 박형진은 그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시선을 인식하고, 변함없던 곳의 생경함을 기록한다. <Hanging>의 납작한 줄무늬는 도심 혹은 교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숙박업소의 입구 현수막의 패턴이다. 이 도상적인 레이어는 일상적인 풍경 속에 자연스레 자리하며 어떤 풍경이든 친숙하게 만든다. 평범한 풍경 속에 홀연히 등장한 이질적인 줄무늬는 인지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보호색을 지녔다. 알아채지 못했을 땐 보이지 않던 것이 보기 시작하니 자꾸만 눈을 마주친다. 전시장의 <Hanging> 역시 그러하다. 빼곡한 풍경들 사이에 놓인 <Hanging>은 마치 익숙한 교외에서 만난 줄무늬 현수막처럼, 천연스럽게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풍경을 가로막고 있는 현수막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퐁티에 따르면 보는 행위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작동한다. 보는 이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이 세계 안에서 지닌 의미를 인지하고, 그 의미를 경유하여 눈앞의 것을 본다.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퐁티는 안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의 은밀한 보완적 상대이며, 보이는 것의 내면에 투명한 무늬로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아도 보았다고 말하던 밤>은 볼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냄새와 연기를 마주한 작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린 풍경이다. 박형진이 ‘보이지 않아도 보았다고 말하던’ 그 밤의 모습은 경험으로 빚어낸 의미가 만들어낸 형상일 것이다. 어둠이 내린 숲속은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눈은 어느새 적응하여 눈앞의 형상을 그린다. 눈앞의 것은 선명하지 않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우린 그 희미한 형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의미는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 

 

마치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듯 천천히 그 세계에 자신을 세우던 박형진은 <주인있는 땅_성북동>에서 불현듯 후레쉬를 켠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얽혀있는 풍경을 향해 빛을 쏜다. 인위적인 마음이 가둔 풍경은 대체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욕심은 보이는 땅을 안 보이도록 숨긴다. 도심 속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멈추어진 땅 역시 담장 너머에 있다. 목적이 없는 것 같고, 무용해 보이지만 사실 그 자체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것의 가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주인은 땅을 둘러싸고 담을 세웠다. 아무도 보지 않고 지나치길 바라는 그 담장 너머의 땅엔 벌써 잡초들이 그곳의 쓰임을 알아채고 터를 잡았다. 박형진은 주인의 욕심이 고립시킨 그 너머의 땅을 본다. 그리고 그곳이 ‘있음’을 들춰내듯 그 모습을 그린다. 무성해진 풀은 담과 담 사이로 빠져나와 누군가 숨겨놓은 공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박형진은 보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만든 너머의 풍경을 보이는 곳으로 옮긴다.

 

눈이 어둠에 완벽하게 적응하려면 3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밝은 빛을 만났을 때 눈부심에서 벗어나는 시간은 2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박형진은 쉽게 빛을 켜지 않고 어둠에 적응하여 주변을 바라본다. 이 지난한 시간을 견뎌 주변의 풍경에 적응하는 것은 비단 멀리 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빛을 낼 수 있다는 이유로 어둠이 당연한 이곳을 헤치지 않기 위해서, 그가 서 있는 곳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박형진은 보이지 않는 경험을 믿고 주변에 적응한다. 보이지 않는 의미는 선명하지 않은 어둠 속을 보이게 만들어주고, 주변을 망가트리지 않고도 눈앞의 것과 멀리의 것을 모두 볼 수 있게 해준다. 박형진은 그렇게 천천히 그를 둘러싼 풍경에 적응하고, 성실하게 그 모습을 기록한다. 마치 서로의 변화를 알아채고 안부를 나누듯 주변의 풍경을 화폭 속에 담아낸다. 하지만 정확한 눈이 필요할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후레쉬를 켠다. 눈을 바로 뜨고 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박형진은 보이지 않는 자본의 논리가 숨겨놓은 곳을 들추어내고, 그 욕심이 얽힌 풍경을 화판 위에 박제시킨다. 한 번 후레쉬를 켜면 또다시 30분이 지나야 암흑에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둠 안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시간이 두렵지 않다. 박형진은 본다. 앞에 놓인 것을,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을, 그리고 너머의 것을.

박형진 개인전 <푸르게 앉아있던 공> 전시 리뷰

: 머금었다 뿜어내고 사라지는

문소영(사루비아 다방 어시스턴트큐레이터, 2020.01)

 

박형진은 주변 현상을 다양한 속도로 관찰하여 작품 속에 응축하듯 담아낸다. 작업은 풍경처럼 제시되지만, 멈추어진 장면(still)이라기보다는 시간성이 느껴지는 체험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전시장은 모눈종이 위에 채워진 풍부한 빛깔들, 언뜻 뽀얗게 보일 정도로 세밀한 필법으로 기록된 풍경들과 그 주위에 어우러지는 비교적 유연하게 그려진 시원한 드로잉들로 채워졌다. 다른 속도와 밀도로 그려진 그림들이 공간을 채우면서 시야를 트이게 하고 작가가 제공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작가는 빠르고 무심하게 흘러가는 풍경 속에서도 묵묵히 머무는 인물이나 태연하게 진행되는 현상들에 반응하고 때로 몰입한다. 도시는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빠르게 변화해왔다. 도시의 건물들은 주변 환경과 그곳에 살게 될 사람들의 삶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최대한 넓은 공간을 창출하여 경제적인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급박하게 지어졌다. 그렇게 지어진 대부분의 건물은 수명이 짧고, 노화가 빠른 만큼 재개발이 잦다. 도시는 끊임없이 가볍게 지어지고 간단하게 허물어진다. 이렇게 짧은 호흡으로 흘러가는 도시를 작가는 꽤 긴 시간을 두고서 관찰하고, 변화의 장면들을 포착한다. 다양한 밀도로 그려진 드로잉과 회화의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그 시선의 깊이를 반영한다. <푸르게 앉아있는 것_성북동>(2018)과 <주인있는 땅> 시리즈는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개인 사유지를 내려다보는 광경을 보여준다. 서울은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재단된 공간 안에 빽빽하게 자리를 잡아야 하지만 어떤 땅들은 여러 미지의 사유로 방치된다. 다소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이 대지를 작가는 몽환적인 장소로 그려냈다. 실재하는 이 땅들은 눈앞에 있음에도 닿을 수 없다는 점에서 꿈보다 더 초현실적인 장소이다. 

 

일련의 작업에 등장하는 그리드는 본래 한 화면 안에 다양한 글자와 형태를 일정하게 배열하기 위해 그어지는 안내선이지만, 작가는 회화의 재료로 해석하여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을 수치화된 이미지로 계획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모눈종이를 사용하고, 때로는 이미 그려진 풍경 위에 무늬처럼 격자를 그려 넣기도 한다. <점이 있던 자리>(2019)에서는 역동적으로 그려진 나무 위로 그려진 격자와 점들이 풍경을 정돈하듯 그려져 있고, <Hanging (Yellow, Red, Green, RG)>(2019)에서는 모눈종이 위로 칠해진 색 면들이 그리드의 규격을 재정립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리드는 배열/배분의 기능 자체보다는 개념적이고 조형적인 요소로써 사용된다. 그리드의 딱딱한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규격과 비규격을 넘나들며 유연하고 자유로운 형상을 전개하는 것이 흥미롭다. 

 

도시를 관찰하던 시선은 신작으로 다가올수록 인위적인 것 보다는 자연으로 향한다. 박형진은 양주 레지던시에 머물면서 근방의 나무, 산, 모텔 등이 들어선 풍경을 관찰하여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작가는 앙상하던 가지에 새순이 돋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빛이 만개하는 것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고, 그 이후로도 멈추지 않고 이어진 변화를 기록했다. 한 해에 가까운 시간 동안 창문 사이로 스며든 빛깔들은 작가가 고른 색들로 종이 위에 기록되었다. 박형진은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로 색을 선택하려고 했다. 색을 고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었음을 시인했지만, 오랜 시간 관찰을 통해 채집하여 쌓인 색들은 한 주관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기보다 방대한 자료를 친절하게 정리한 것처럼 보였다. 풍경이 그림으로 눈에 닿기 위해서는 화가의 번역이 필요하다. 이 번역의 과정에서 화가의 톤(tone)이 묻어나기 마련인데, 박형진의 빛깔들은 헌신과 열정의 기운보다 차분한 수행의 기운이 감돈다. 그래서 그림이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작가가 기록한 시간에 따른 빛의 기록, 그 결과물인 페인팅 작업과 유연한 드로잉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작가의 지난 열두 달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그리드는 구획을 위한 도구라기보다 잘려 나간 산이나 돌의 단면에서 보이는 지층―켜켜이 쌓인 시간―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시간은 격하게 혹은 잔잔하게 그림 속에 쌓였고, 그림은 아득한 시간을 한눈에 보이게 하거나 시계처럼 특정 시간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시간은 기록되지 않으면 그대로 흩어져버린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들은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자연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시간을 끊임없이 머금었다 뱉어내기를 반복한다. 이 순환의 과정에서 화가의 역할은 그림으로써 이 현상을 포착하는 것이다. ‘푸르게 앉아있던 공’은 방치된 땅이 잡초로 무성해지고, 계절이 푸르게 만개했다 앙상한 가지로 돌아가는 순환의 풍경을 다양한 시각으로 담아냈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고유의 속도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가장 큰 능력일 것이다. 박형진의 그림은 당연하게 지나쳐버리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번 전시는 빠름과 느림, 유연함과 긴장감, 섬세함과 자유분방함을 적당히 조율하여 다채로운 시각 환경을 제공했고, 관객의 입장에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풍경의 시대

 

이성휘(2019)

 

박형진은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그 풍경은 일상적인 풍경이되 평화롭거나 픽처레스크 하기 보다는 작가가 일상생활 중에 지속적으로 관찰하게 된 변화나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는 풍경이다. 작가는 “매일 지나다니며 벽으로 마주하던 담장, 그 속의 땅,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장소, 누군가의 반복된 행위, 변화하는 풍경, 모눈종이,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 등”이 작업의 주된 소재라고 말한다.[1]특히 그는 도시외곽에서 성장하면서 난개발로 인해 무질서하게 전개되는 풍경의 변화를 목격하였고, 이 모든 광경이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논리라는 측면에서 함부로 다뤄지거나 방치되기를 반복하며 펼쳐진 풍경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렇게 난폭하게 다뤄진 풍경이 도시 외곽뿐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서도 바리케이트 한겹을 사이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도 상기시킨다.

 

지난 여름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 레지던스 내 전시공간에서 개최한 박형진의 개인전 《shallow document》은 작가가 이곳에 체류하면서 관찰한 작업실 주변 풍경을 그린 작업들과 작가의 이전 작업들을 함께 소개하는 전시였다. ‘얕은 기록’이라고 칭한 전시제목으로 보아 작가는 이 전시를 한시적인 체류자로서의 기록이자 작업으로 여긴 듯하다. 그는 양주 레지던시에서 생활과 작업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작업실을 이곳으로 옮겨 오며 나는 5층의 작은 방에서 창을 통해 풍경을 마주한다. 창문 가까이 의자를 두고 앉으면 보이는 요양원의 창과 불빛, 할머니, 시계, 창문과 떨어져 테이블을 두고 의자에 앉았을 때 보이는 전면의 산, 시간이 주는 풍경의 변화를 바라보며 앙상한 가지뿐이었던 겨울에는 가지뿐인 나무를 그렸고 여름으로 넘어가며 짙어진 녹색을 마주하면서는 내가 가진 초록의 물감을 펼쳐두고 눈앞의 여름 숲의 초록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2]

 

작가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형진의 작업은 가까운 거리에있는 풍경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 및 기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는 교외 풍경이라고 하면 언뜻 한적하고 평화로운 자연 풍광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작가가 보는 풍경은 자본의 논리로 땅의 가치를 환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환경이다. 이는 현재 작가가 체류 중인 레지던시 주변의 풍경이기도 하고, 과거 그가 성장한 동네의 풍경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도심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작가의 이전 작업인<주인 있는 땅_송현동 48-1>(2015)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였으나 거대 자본이 설치해 놓은 높은 담으로 인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땅의 풍경화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탓에 일반인들에게는 미스테리했던 이 땅은 이곳이 소재한 지역의 역사적 맥락이나 현재 주변 시설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오직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개발이 이뤄질 예정이라는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개발이 잠정 중단되었음을 보여주는 듯 잡풀이 무성해진 담장 안의 풍경과 달리 박형진은 담장 밖의 풍경을 그리지 않고 여백으로 비워두었다. 마치 실제 장소에서 이 부분만 오려낸 것처럼 묘사한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땅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는지 보여준다. 높이 둘러져 있는 담장은 우리가 땅을 전적으로 소유의 개념에 입각해 인식하고 있으며, 잡풀이 무성한 땅의 모습은 자연으로서 보호되기 보다는 자본의 개발 논리에 의해서 땅이 다뤄지고 있음으로 보여준다. 

 

오늘의 우리가 자연과 땅을 땅을 더불어 사는 자연이 아니라, 자본이자 소유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박형진의 회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낸다. <주인 있는 땅_송현동48-1>에서처럼 담장을 경계로 하여 안쪽의 사유지를 묘사하고 여백은 과감히 비워두기도 하고,<좁은 방 넓은 들>(2016)에서는 집단묘지의 분묘를 일일이 그려 넣었다. 낮은 능선 자락을 밀어내 집단묘지로 개발한 광경은 우리가 교외에서 종종 목격하게 되는 풍경이다. 여기에 분묘자리로 일일이 묘사된 사각형은 대략 우리가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갈 때 소유하게 되는 면적이다. 또한 이 그림 표면 전체에는 지도에서나 볼 법한 세필로 그은 모눈 눈금과 망점이 규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 전면에 고르게 그어진 눈금은 지도에서처럼 마치 측량의 단위를 제시하는 듯하다. 동시에 회화적으로는 원근이 있는 공간적 묘사에 올오버, 즉 전면적인 평면성을 겹쳐 놓는다. 그럼으로써 회화가 재현한 풍경의 공간감을 모눈 눈금이 방해하게 된다. 이것은 자본이라는 잣대로 땅과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도 같다.

 

<좁은 방 넓은들>에서처럼 작가에게 모눈 눈금은 인간이 자연의 개발과 소유를 위해 측량하는 잣대를 연상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작업을 위해 작가가 풍경과 마주한 시간의 단위이기도 하다. 그는 모눈종이에서 시작해서 전지로 작업을 발전시키기도 하며, 어떤 작품은 모눈종이에서 시작해서 모눈종이에서 마무리된다. <초록 창문 시간> 시리즈는 작가가 양주 작업실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을 담았다. 그는 거의 매일 같이 일정한 시간 동안 창 너머로 보이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 변화를 녹색 물감의 색조를 통해서만 기록했다. 수십장의 모눈종이에 담긴 물감자국은 그가 창밖의 풍경을 내다본 시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시에 자연이 자연적으로, 즉 인간이 아무것도 가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풍경을 장면이자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우리에게 풍경이 담지한 시간을 주지 시킨다. 

 

서양 회화사에서는 풍경화를 통해 시대, 정치적 상황, 종교, 이데올로기, 계급 문제 등을 읽어내곤 한다. 박형진의 회화 역시 21세기 특정한 시대를 사는 우리가 자연을 어떤 논리에 의해 개발하고 다루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적 풍경이자 정치적 풍경이다. 우리는 풍경화를 자연에 충실한 중성적인 성격의 장르로 이해하기 쉽지만 어쩌면 자연의 충실한 묘사라는 것은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박형진이 ‘얕은 기록’이라고 칭한 그의 작업들은 오늘의 우리가 자연에 투사한 욕망이 얼마나 시대적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작업이다.  (끝)

 

 

 

[1]박형진, 《얕은 기록》(2019.7.30-8.11,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갤러리777)의 전시도록에 수록된 작가의 글에서 인용.

[2]위의 글에서 인용.

The Time of Landscapes

 

Sunghui Lee

 

Hyungjin Park makes paintings of surrounding landscapes. The landscapes are everyday landscapes, yet, rather than being serene or picturesque, they are documentations of sensory changes of her surroundings. The artist states that the main subject of her works is “the high security fence wall which segregates the land from its intrinsic identity as nature, and the forgotten land inside where she looks down trespassers strange behaviors in a distance while the land still cherishes innocent memories, seasonally changing colors and figures of landscapes indifferent from severe urban compartmentalization that she almost stoically depicts on a graph paper, the descent people who carries on their daily jobs on the land etc.’[i]In particular, whilst growing up in the suburbs, the artist had witnessed drastic changes in surrounding landscapes as a result of rapid sprawling development, and she emphasizes that these mistreated landscapes are an abstract self-portrait of human being severely detached from the natural land and their desire driven by capitalism.

 

Park’s recent solo exhibition, shallow Document, held in Yangju City Art Studio was the attempt of re-interpreting the landscape surrounding her studio that she had previously dealt with in her earlier works. The title “shallow document”, is the clever statement  that she deliberately belittles the position of painter as a documenter and reinventing the use of painting as a sensory diary of sojourner’s observation. She described her life and work in Yangju residency as follows:

 

After I moved into this place, I was constantly facing with the landscape through a window in my small studio on the 5th floor. I drew windows and lights of the sanatorium, old ladies, and the clock I see when I sit on a chair close by the window, the mountain at the front which I see when I sit far from the window with a table, whilst looking at the changes in landscape given by time, in the winter when there were only skinny trees, I drew trees that were mere branches, and as I faced the darkened greenery whilst passing into summer, I laid out the green paints I had, and observed and documented the greens of the summer forest soaked into my eyes.[ii]

 

Park’s work is based on pure observations, and her work is meticulous documentations of her impressions on surroundings both figuratively and aesthetically. She boldly refuses the clichéd of orthodox landscape as a peaceful scenery, and by re-projecting landscapes on a sheet of grid paper, she satirically criticizes the quantifiability of the modern land that fragmentizes the previously seamless land into commercial pieces for profits. In her previous work, Land with an owner_Songhyun-dong 48-1(2015), the site is located at the center of Seoul where it is hard to find undeveloped land. This particular land was fenced up heavily by the owner for a long period, but finally became known to the public after news report revealed that the land was going to be harshly reformed by series of constructions without preserving contextual, historical legacies that the land had accumulated in its vicinity. In this painting, Park had not drawn any figures outside the property line of the land and intentionally left them as blank. By doing this, now the land almost looks like a miniaturized model had been scooped out from the actual place and vanished into a surreal purgatory for display. This technique insinuates the degenerated value of the land entirely based on the ownership, and the desolate mood of the land with overgrown weeds shows that land is being dealt based on the capital logic of development rather than it be protected as pure nature.

 

In Narrow Land, Wide Field(2016), she drew the cemetery. The ridge of the mountain was scraped away by heavy machineries, and the naked land became a shelter for the dead. The series of rectangles, each depicted the tiny single grave space, are satirization that the idea of possession of mortals became eventually nullified when it encountered with the true immortal- nature. Park underlaid hand-drawn grid markings through the whole painting which resembled the unit measurement system in 2-D maps, and this subtly disturbs the perspective of the scenery and returns it to the all-over flatness as if the death simplifies spectacles of life into singularity- humbleness.

 

In the series, Green Window Time, Park attempted to see the nature as it is without any econo-political preconception by committing to the rigorous observation routine. Almost everyday, she sat in front of her Yangju studio window and started documenting greeneries perceived through a frosted glass by smudging color dots on the graph paper. Park also left the hand-written time marks at the margin, and this sublimates series of dots of impressions into a fully conducted documentation which not only archives the scenery but the time that the landscape must hold.

 

In Western paintings, landscapes are often effective narratives describing times, political circumstances, religion, ideology of the era. Park’s landscape is  also the narrative of 21stcentury that the nature has been mistreated by capitalism, and in this sense, we can call her paintings as ‘landscapes of time and politics’. Although it is easy for us to understand landscape painting as a genre of neutral character solely faithful to nature, sincere observations and candidly depiction on nature may be a way to rehabilitate our distorted posture to nature. In that regard, Shallow Documentare works that plainly show us how timely our desires projected in nature are. 

 

[i]Quoted from the artist’s notes in the exhibition catalogue Park, Hyungjin, Shallow Document(30th of Jul.-11thof Aug., 2019, Gallery 777, Yangju City Art Studio)

[ii]Quoted from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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